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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즈상
필즈상(영어: Fields Medal)은 캐나다 수학자 필즈의 유언에 따라 그의 유산을 기금으로 만들어진 상이다. 수학 부문에서 권위가 있는 상이라 하여 세인들이 흔히 "수학의 노벨상"이라고도 부르지만, 노벨상 위원회와는 관련이 없다.
4년에 한번씩 수여되며, 현재는 4로 나누어 나머지가 2인 해에 수상자가 결정된다. 만 40세 이하인 젊은 수학자들에게만 수상 기회가 주어진다는 전통이 있다. 1936년에 처음 시상되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14년간 시상이 중단되었다가 1950년부터 다시 시상이 이어졌다.
1962년까지는 2명의 수학자에게만 상이 수여되었으나, 1966년부터는 최소 2명, 최대 4명까지 주도록 규정을 변경했다. 국제 수학자 회의(International Congress of Mathematicians)에서 수상자를 결정한다.

가장 최근에는 2006년 8월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있은 국제 수학자 회의에서 안드레이 오쿤코프(Andrei Okounkov), 그리고리 페렐만(Grigori Perelman), 테렌스 타오(Terrence Tao), 벤델린 베르너(Wendelin Werner) 4명에게 수상하기로 했으나, 그리고리 페렐만이 수상을 거부하는 일이 있었다.

출처 : 위키백과
 
 
필즈상 뒷 이야기
필즈메달의 소개 : 무엇이 현대 수학의 역사를 만드는가?
 
필드상 뒷 이야기 - 왜 노벨상엔 수학이 없는가
  
알프레드 노벨(Alfred Nobel, 1833-1896)은 스웨덴 출신이지만, 생애의 대부분을 프랑스를 위시하며 유럽 지역 내의 외국에서 보냈다. 따라서, 노벨의 사생활이나 유언에 대한 해석도 그가 살았던 나라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다. 프랑스와 미국인들에 의하면, 노벨이 그의 유언에 '노벨 수학상'을 포함하지 않는 것은 그가 당대의 유명한 수학자인 미타그레플러(Magnus Go"sta Mittag-Leffler, 1846-1927)와 한 여인을 사이에 두고 삼각관계에 있었던 것에 기인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스웨덴 측에서는 만일 노벨 수학상이 있었다면 그 당시 스웨덴의 대표적인 수학자였던 미타그레플러가 한림원으로 하여금 자기를 첫 수상자로 선정하게끔 영향력을 행사하리라는 것을 미리 알고 첫 수상자가 되는 것을 달갑지 않게 여긴 이유는 자신의 연적이어서가 아니라 미타그레플러 때문에 보다 우수한 다른 수학자들이 불이익을 당할 것을 우려했을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노벨과 관련하여 세인의 입에 지금까지 오르내리고 있는 미타그레플러는 19세기 말엽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스웨덴의 최고 수학 권위자로 알려져 있으며, 왕성한 학회 활동으로 스웨덴을 비롯한 유럽 학회에서 주목을 받았던 인물이다. 그가 창간한 '수학동향(Acta Mathematica)'지는 1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수학계에서는 가장 권위있는 저널로 불려지고 있다. 또한 그는 소냐 코발레브스카야(Sonya Kovalevskaya)라는 여성을 유명한 수학자로 키우는데 큰 역할을 했으며, 지금의 스톡홀름 대학으로 발전한 스톡홀름 호그스콜라(Stockholm's Hogskola)의 원장을 지냈다. 이처럼 화려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만일 노벨 수학상이 존재했다면 미타그레플러가 과연 첫 수상자로 지목될 수 있었을 지는 장담할 수 없다. 왜냐하면 유럽에는 이미 학문적으로 그를 앞선 뽀앙카레(H. Poincara, 1854-1912)힐버트(David Hilbert)등의 수학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스웨덴 학계에 로비를 가한다면 수상이 가능할 수도 있었을 것이나 그럴 경우 세계 최고를 지향하는 노벨상의 취지에 위배되었을 것인즉, 아마도 노벨이 미타그레플러를 의식했다면 다름 아닌 이와 같은 이유였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한편에서는 수학이 노벨상에서 제외된 것은 단순히 수학에 대한 노벨의 관심 부족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는 노벨의 유언을 집행하고 후에 노벨 재단의 책임자가 된 레그나 솔맨(Ragnar Sohlman)이 제공한 자료에 근거한 해석이다. 노벨은 인류의 행복에 기여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상을 제정하여 매년 그의 유산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상금을 주도록 유언하였다. 그 상은 물리, 화학, 의학, 문학, 그리고 형화의 다섯 분야에 주어졌는데, 이들은 모두 노벨이 생전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분야였다. 그 중 물리와 화학은 노벨 자신의 직업과 깊은 연관이 있었고 문학은 평소 노벨의 문학에 대한 조예를 반영하는 것이었으며, 평화상은 그의 이상주의와 '무기를 버려라'라는 책의 저자인 베르타 폰 슈트너와의 우정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발명가이자 기술자였던 노벨은 과학상 수상 대상자는 반드시 '발명이나 발견'을통해 '실질적인 인류 복지'에 기여한 자라야 된다고 명시하였는데, 그 당시 학문의 성격상 이론 위주인 수학을 실용성 있는 분야가 아닌 것으로 간주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물리 분야만 보더라도 이론보다는 실험 분야에서 휠씬 많은 수상자를 배출해 왔다. 이밖에도 노벨과 미타그레플러의 관계가 노벨 수학사의 부재와 무관하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여러 가지 설명들이 있다. 노벨은 스웨덴 한림원의 멤버였지만 스웨덴의 학자 사회와는 별로 교류가 없었던 사람이다. 그는 성 페테르스부르그에서 학교를 다녔고, 1863년 이후로는 거의 스웨덴을 떠나 있었다. 그리고 1870년 중반에는 파리에 정착해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미타그레플러와 접촉이 거의 없었을 것이며 둘 사이에 어떠한 적대 감정이 존재했으리라고는 추측하기 어렵다. 오히려 미타그레플러는 노벨이 사망하기 몇 해 전부터 노벨 재산의 상당 몫을 호그스콜라의 금으로 유치할 것을 추진해 왔다고 알려지고 있는데, 만일 두 사람 사이에 응어리가 있었다면 이것이 가능했을까.

노벨은 유언장을 두번 작성했다. 세상을 떠나기 3년 전 작성된 첫번째 유언에 호그스콜라는 다른 대상들과 함께 상속에 포함되었는데, 이는 미타그레플러의 노력의 결실로 볼 수 있겠다. 비록 두번째 유언에서는 노벨이 유언이 전부를 노벨상에 기증함으로써 무산되기는 하였지만, 두 사람 사이에 개인적인 관계가 존재했다 하더라도, 노벨이 더할 나위 없이 숭고한 이념 하여 노벨상을 창설하는 마당에 사사로운 감정 때문에 상의 취지를 왜곡시키는 것은 스스로 용납했을 것으로는 보기 어렵다. 이를 감안할 때, '노벨상에 수학이 포함되지 않는 것은 수학에 대한 노벨의 관심부족 때문이다'라는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어보인다. 이런 점에서 프랑스와 미국에서 주장하는 '연적설'은 단지 흥미 본위의 해석으로밖에 볼 수 없을 것이다. 러나 불행하게도 미타그레플러는 노벨상에 수학이 제외된 것과 관련하여 수학계의 비난의 표적이 되어 왔다. 많은 수학자들이 노벨상에 수학이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에 대해 불만이 있었고, 그 때마다 노벨과 미타그레플러 간의 이야기가 거론되곤 했다. 하지만 현대 수학의 역사를 통해 볼 때 미카그레플러는 수학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필즈상의 창시자인 존 찰스 필즈(John Charles Fields, 1863-1932)와의 다년 간의 우정을 통해 이러한 수학계의 불만을 해소하는데 일조를 한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자료 발췌 : 고등과학원 부원장 명효철교수의 필즈메달의 소개
(무엇이 현대 수학의 역사를 만드는가?)에서
 
수학계 사람들 - Fields 수상자
Fields Medal Prize와 수상자들의 정보를 제공합니다. 수상년도 및 수상자 리스트가 제공되며, 더 자세한 내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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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IST Workshop on Syzygies and Geometry
수상년도 수상자 출생지
2010 Elon Lindenstrauss Jerusalem
  Ngô Bảo Châu Hanoi, Vietnam
  Stanislav Smirnov St. Petersburg, Russia
  Cédric Villani France
2006 Terence Tao University of California, Los Ang
  Andrei Okounkov Princeton University
  Grigori Perelman St. Petersburg, Russia
  Wendelin Werner University of Paris–South
2002 Vladimir Voevodsky Madras[now Chennai](India)
  Laurent Lafforgue Antony(France)
1998 Curtis T. McMullen Berkeley(USA)
  Maxim Kontsevich Moscow(Russia)
  William T. Gowers Marlborourgh(England)
  Richard E. Borcherds Cape Town(South Africa)
1994 Efim I Zelmanov Novosibirsk(Russia)
  Jean Bourgain Ostende(Belgium)
  Jean-Christophe Yoccoz France
  Pierre-Louis Lions Grasse, Alpes-Martimes(France)
1990 Edward Witten Baltimore, Maryland(USA)
  Shigefumi Mori Nagoya(Japan)
  Vaughan Frederick Randal Jones Gisborne(New Zealand)
  Vladimir Gershonovich Drinfeld Kharkov(Ukraine)
1986 Michael H. Freedman Los Angeles
  Gerd Faltings Gelsenkirchen-Buer(Germany)
  Simon K. Donaldson Cambridge(England)
1982 Shing-Tung Yau Kwuntung(China)
  William P. Thurston Washington, D.C.
  Alain Connes Darguignan(France)
1978 Daniel G. Quillen Orange, New Jersey(USA)
  Gregori Aleksandrovitch Margulis Moscow
  Charles Louis Fefferman Washington, D.C.
  Pierre Deligne Brussels(Belgium)
1974 David Bryant Mumford Worth, Sussex(England)
  Enrico Bombieri Milan
1970 John Griggs Thompson Kansas(USA)
  Serge Novikov Gorki(USSR)
  Heisuki Hironaka Yamaguchi-ken(Japan)
  Alan Baker London
1966 Stephen Smale Flint(Michigan)
  Alexander Grothendieck Berlin
  Paul Joseph Cohen Long Branch(New Jersey)
  Michael Francis Atiyah London
1962 John Willard Milnor Orange(New Jersey)
  Lard Hormander Mj?llby/Blekinge(Sweden)
1958 Rene Thom Montbeliard(France)
  Klaus Friedrich Roth Poland
1954 Jean Pierre Serre Bages(France)
  Kunihiko Kodaira Tokyo
1950 Laurent Schwartz Paris
  Atle Selberg Norway
1936 Jesse Douglas New York
  Lars Valerian Ahlfors Helsin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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